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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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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피폐해진 민심을 대변한 도적
임꺽정의 난
임거정의 난
임꺽정의 무리가 활개를 치던 명종 16년(1561) 10월, 당시의 상황을 《명종실록》은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다.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왜 백성, 즉 농민이 모이면 도적이 되고, 그 이유를 ‘왕정의 잘못(王政之失)’이라고 《명종실록》은 적었을까.
시대 1559년
배경
1511년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관청인 진휼청을 설치하다.
1555년 전라남도 일대에 왜구가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나다.
1557년 황해도에서 민란이 일어나다.
설명
임꺽정(林巨正)은 경기 양주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도살업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임꺽정은 날쌔고 용맹스러웠으며, 힘이 장사였다. 그는 1559년 유랑 농민이나 아전, 노비, 역리, 수공업자, 평민 등 다양한 사람들을 규합해 1562년 관군에 체포될 때까지 황해, 평안, 함경, 강원, 경기도 일대에서 약탈과 살인, 방화를 저지르고, 관청을 습격했으며, 정부 토벌군과 맞서 싸웠다. 그럼에도 일반 백성들은 임꺽정의 무리에 호응하거나 결탁해, 이들을 돕거나 숨겨 주기도 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의적(義賊)’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조정을 비롯한 지배층이나 고을 수령, 하급 관리 등의 학정과 수탈에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겪던 백성들은 임꺽정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역사가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경기에서 황해까지 백성과 아전들이 임꺽정의 무리와 결탁해, 관가에서 잡으려고 하면 먼저 알려줘 이들이 거리낌 없이 돌아다녀도 잡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백성을 ‘모이면 도적’으로 만들고, 임꺽정 무리가 의적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경제적 모순과 구조적 폐해로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그만큼 백성들의 동요가 심했기 때문이다.
민생을 도탄으로 몰고 간 것은 대표적으로 전세(田稅)와 방납(防納), 군역(軍役), 환곡(還穀) 등이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는 왕실과 척신 및 권신, 양반 등의 토지 겸병이 성행해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빚어졌고, 관료들의 과도한 수취까지 겹쳐 농민들은 과중한 부담에 허덕였다. 국가가 농사를 짓지 못하는 진전(陳田, 묵정밭)에서도 전세를 거두거나, 지주가 내야 할 전세를 소작농이 대신 부담하는 일이 잦았다. 또 서리와 상인이 결탁해 농민 대신 공물을 바친 뒤 농민에게서 높은 대가를 받아 내는 방납이 성행해 농민의 고통이 더욱 컸다.
당시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서리의 횡포를 두고 ‘서리망국론’이라며 개탄했다. 군역도 농민에게는 큰 짐이었다. 농민은 국가에 무명 20필 안팎을 바치고 다른 사람에게 군역을 대신 지게 할 수 있었지만, 이를 감당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와 함께 춘궁기에 빈민에게 식량을 빌려 주고 가을에 원곡(元穀)만 받는 의창제(義倉制)가 폐지되면서, 국가는 상평창(常平倉)으로 하여금 원곡의 10퍼센트를 환곡이란 이름으로 받게 했다. 하지만 실제 비율은 그보다 높아 사실상 고리대 수준이었다. 게다가 연이은 가뭄과 흉년, 지진으로 민생은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이러다 보니 고향과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농민이 속출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이들 가운데 산간이나 섬에 근거지를 두고 집단으로 떼를 지어 다니며 도적질로 연명하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에는 수령이나 서리의 가렴주구와 부정, 부패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속속 합류했으며, 이렇게 무리를 지은 도적떼를 군도(群盜)라고 불렀다.
임꺽정은 명종 14년인 1559년 황해도 구월산 등을 근거지로 도적떼를 일으켰다. 상업이 발달한 교통 요충지나 사신의 왕래가 잦은 역촌(驛村) 지역, 백정들이 많이 모인 곳 등이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권문세가나 내수사의 농장으로 편입된 황해도 일대 갈대밭 지역도 이들의 거점으로 활용됐다. 이들은 황해도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8~9개의 조직으로 나눠 황해도 재령, 해주, 구월산, 평안도 성천, 양덕, 맹산, 강원도 이천 등지를 휩쓸었다. 특히 이들은 서울과 지방을 잇는 주요 길목을 장악해 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공물과 진상물을 빼앗고, 부자들을 습격해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개성이나 한양 등지에서 약탈한 물건을 팔아넘겼다. 또 관아의 창고에 있는 곡물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눠 주거나, 체포된 동료를 구출하는 등 국가 권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토포사(討捕使)를 여러 차례 보내서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던 중 1559년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이 관군 20여 명을 거느리고 인근에 있는 임꺽정 무리의 소굴을 습격하다 오히려 패퇴한 일이 생겼다. 이에 조정에서는 임꺽정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선다.
고석정
고석정 강원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에 위치한 정자이다. 신라 진평왕이 세우고, 고려 충숙왕도 찾은 장소이며, 조선 시대에 들어 임꺽정이 고석정 부근에서 은둔하였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 있는 것은 1971년에 재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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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8월, 임꺽정 무리가 한양에 나타나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2가 부근)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자 부장을 활을 쏘아 맞히고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임꺽정의 아내가 붙잡혀 형조 소속의 종으로 배속됐다. 이 일이 있은 뒤 관군은 한양으로 통하는 진입로를 봉쇄하는 등 경비를 강화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임꺽정의 모사인 서림(徐林)이 엄가이(嚴加伊)로 이름을 바꾸고 한양으로 몰래 들어가려다 숭례문 밖에서 체포됐다. 관군은 서림을 통해 임꺽정의 무리가 장수원(長水院)에 모여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아냈다. 변절한 서림은 황해도 평산 남면 마산리에 있는 대장장이 이춘동의 집에 모여 신임 봉산 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것도 털어놨다. 이흠례는 여러 차례 임꺽정의 패거리를 붙잡아 영전한 인물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 소속 군사 500명을 집결시켜 마산리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관군은 크게 패해 부장 연천령(延千齡)이 죽고 많은 군마를 빼앗겼다. 이를 보고받은 명종은 임꺽정의 무리가 출몰한 5개 도에 대장을 한 명씩을 두고 일제히 체포령을 내렸다. 이즈음 서흥 부사 신상보(辛商輔)가 임꺽정 무리의 처자 몇 명을 감옥에 가두었는데, 대낮에 임꺽정 무리가 옥사를 부수고 이들을 구출한 일도 있었다.
조정에서 연일 임꺽정 무리를 잡아들일 것을 독촉하자, 관군의 소탕 작전도 한층 강화됐다. 이 과정에서 허위 보고가 올라가거나 무고한 사람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1560년 12월,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으로부터 올라왔다. 하지만 의정부의 조사 결과, 붙잡힌 사람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 형인 가도치(加都致)로 드러났다. 이 일로 이사증은 책임을 지고 파직 조치됐다. 1561년 9월에는 의주 목사 이수철(李壽鐵)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확인 결과 해주 출신의 군사 윤희정이 이수철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한 것이었다. 이에 이수철도 파직됐다.
관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임꺽정의 무리는 같은 해 10월 대낮에 해주 지역 민가 30호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다. 조정에서는 황해도 토포사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金世澣)을 임명하고 이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임꺽정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한양과 개성, 평양에서는 관군의 수색 작업이 연일 계속돼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을 모두 잡아들였다. 때문에 한양에서는 온종일 호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울러 5개 도의 시장은 모두 문을 닫았고 관청 업무도 중단됐다.
이런 가운데 1562년 1월, 드디어 남치근이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郭舜壽)와 홍언성(洪彦誠)이 임꺽정을 잡았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당시 남치근이 재령에 진을 치고 구월산을 올라가며 수색하자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민가에 숨어들었다. 관군이 민가를 뒤지기 시작하자 임꺽정은 주인 노파를 위협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게 하고, 소란스런 틈을 타 군졸의 말을 빼앗아 달아났다. 하지만 서림이 “저 사람이 임꺽정이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끝내 생포됐다. 임꺽정은 잡힌 지 15일 만에 처형당했다. 이렇게 해서 임꺽정의 난은 진압됐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홍길동(洪吉童)과 임꺽정, 장길산(張吉山)을 일컬어 조선의 3대 도둑이라고 했다. 하지만 임꺽정이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당시 양반 사회의 모순에 맞서 관군과 싸움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의 행적은 도적질을 넘어 ‘반란’으로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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